몇 년 전 한 개발자가 인터뷰에서 게임 디자이너 무용론이라고 부르는, 게임 개발에 게임 디자이너가 필요없다는 논지의 이야기를 했더랬다. 여기저기에서 게임 개발자들이 모이는 공간에서는 이 이야기로 인해 '게임 개발에 기획(디자인)이 필요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대한 이야기가 활발하게 논의되었는데, 그 화제의 개발자가 만든 두 번째의 게임이 바로 C9이다.

C9을 설명하는 다양한 말 중에서 가장 적합한 말은 '던전앤파이터 3D'라는 거다. 플레이어들은 던전앤파이터와 같이 클래스별로 독특한 기술들을 활용해서 방 형식으로 나누어진 던전을 돌며 괴물들을 두들겨 패고 방 안의 괴물들이 사라지면 다른 방을로 연결되는 통로의 문이 열린다. 방에 들어가면 또 두들겨 패고, 패고 마지막 방의 보스를 또 두들겨 패면 끝난다.

두들겨 패는 게임에 다행히도 두들겨 패는 맛은 꽤 훌륭하게 구현되어 있다. 손에 착착 감기는 손맛으로 플레이어들은 마우스 버튼을 눌러 공격을 하고 간간히 1234로 클래스의 특색에 맞는 기술을 사용한다. 정석이 되어가고 있는 (WASD와 단축키, 마우스를 부지런히 조작해야 하는) WOW의 전투 컨트롤과도 또 다른 맛으로, 3D 공간에서의 액션 게임을 잘 구현하고 있다.

문제는 여기서 한 발자국도 더이상 나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싸움의 명분을 제공하고 있지도 않고 동기부여나 혹은 거기에 적절한 보상으로 플레이를 유도하지도 않는다. 공간이 있고 몬스터가 있으니 그저 두들겨 팰 뿐이고, 죽으며 떨군 아이템을 줏어 입으며 그저 두들겨 팬다.

오 이런, 게다가 던전앤파이터의 그 피로도가 C9에 그대로 들어있다. 플레이어들은 제한된 시간이 지나면 그 캐릭터로는 더 이상 플레이할 수 없다는 뜻이다. 피로도는 플레이어가 게임에 과몰입되는 것을 방지한다는 명분을 쓰고 있지만 실상 컨텐츠 소모 속도를 늦추는 목적으로 도입되었으며, 이 두 가지 목적 외에는 오히려 게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부작용을 초래하는 요소라는게 치명적이다.

던파의 피로도와 던파의 슈퍼아머와 던파의 던전 난이도와 던파의 던전 구조, 던파의 (바닥에서 솟아올라오는 창살) 함정과 던파의 다운 공격, 던파의 아이템과 생산 시스템, 던파의 공중 콤보, 던파의...

기획이 없는 게임 개발. 그래서인지 이렇고 저렇고를 다 떠나서 R2와 C9이라는 게임에는 '독창성(originality)'이라는 것이 없다. 기술적으로 최고 수준임에도 자신만의 색깔도 철학도 없는 게임을 만드는 것을 보면 마치 영원히 성공한 2류로 살겠다는 각오라도 한 것 처럼.

옛날 리니지 천하에서 뮤(Mu)가 단지 3D라는 것만으로 시장에서 흥행했던 전례를 던파 천하에 C9으로 그대로 대입하듯, C9은 그렇게 철저하게 던파를 벤치마크하고 카피했다. 훌륭한 그래픽과 액션, 3D 공간의 던전을 구현했다는 부분에는 찬사를 보내지만, 던파만으로도 지겹게 했던 피로도 뺑뺑이를 C9에서까지 해야될까?

게이머는 학습을 누적하며 게임의 경험들을 차곡차곡 쌓아간다. 이전에 경험했던 게임 플레이는 매우 빨리 싫증나게될 가능성이 높다. '던파의 던파의 던파의 던파의...'로 일관되는 디자인으로 먹힐까? R2를 보면 먹힐듯하기도 하다마는...

  • 철학이 없는 것도 철학이라면 철학인가 싶기도 하고.
  • 그런데 쓸데없이 흐려짐 효과(blur)는 왜 이렇게 눈아프게 여기저기 남발하는지...